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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습작

사르트르를 등지고

쿠프카 2019. 2. 15. 0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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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려오는 배신감은 체내에서 맴돌며 터져나올 구멍도 없이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

서럽게 울며 미친듯이 소리친다 해도 편의점에서 사다 입에 털어넣는 소염진통제처럼 흔한 대증요법도 되지 못한다. 다들 그렇게 실연을 잊어간다고들 하지만 결국 모두가 마지막에 삼키고 마는 투박한 알약의 이름은 시간일 테니까.

각지의 언어로 노래하고 시대를 넘어 고전과 현대를 잇는 연속된 플롯 속에서 읽어냈던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는 참 많은 걸 배웠지만 고작 한 연애의 끝자락에서는 너무나 연약하고 바보처럼 행동했다. 아무래도 쉬이 잊고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나 가볍게 떠나버리다니. 지금껏 함께 했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함께 웃고 많이 싸우고 가끔 울었던 기억들. 한 줌의 바보같은 먼지로 날아가버릴 추억이었다. 헤어지고 난 뒤에는 낫지 않는 흉터처럼 짓무르고 더러운 아픔만 남겨둘 뿐이라니. 그래, 세상에 좋은 이별이라는 건 없었던 것일지도 몰라. 미련이 남은 몇 명의 능력 있는 작가들이 온갖 미사여구로 시체와 죽음의 영속성을 찬양하는 모양새였을 뿐.


그는 아버지의 이직에 따라 어쩔 수 없이 가족과 함께 외국으로 향한다고 했다.

나는 '어쩔 수 없다'는 그의 논리적 비약을 집요하게 공격했다. 우리는 이제 소년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한 두 어른으로 서로 손을 맞잡고 두 사람만의 삶을 천천히 걸어가자고 말했다. 물론, 시적이지 않은 어조와 내용으로. 그는 지금껏 우리가 함께 했던 많은 토론과 진리에의 탐색을 무위하다고 단언했다. 속되고 헛된 숫자와 제도의 나열을 반복했다. 가령, 작금의 생활고나 취업의 어려움 그리고 외국에서 기다리고 있는 수많은 기회를 붙잡아야만 한다며. 그렇게 변명을 늘어놓는 그의 과장된 몸짓과 어조는 거의 뉴프런티어의 선각자였다. 그렇게 자신을 꿈에 도취된 바보처럼 가장하고 있었다.

특히 강조하는 부분은 외국의 대학원이었다. 그곳에서 자신이 지금보다 더욱 좋은 환경과 열의로 연구를 계속할 것이라는 주장을 역설했다. 각 분야의 학자로서 우리는 공통점이 많았다. 세상의 무엇인가를 계속 공부하고 싶은 무한한 학구열. 그 앞에서 우리는 서로 무릎을 꿇고 신실한 마음으로 서로를 존중했다. 그는 우리가 결코 간섭하지 않았던 성역을 군홧발로 짓밟고 단순히 합리화의 도구로서 사용했다.


그의 뺨과 나의 손바닥이 맞닿는 우발적인 충돌이 있었고.

나는 갑작스런 가해자로서의 입장을 견디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고 주먹을 꽉 쥐었다. 나의 행동을 이끌어낸 것은 비록 그였지만, 이런 이별의 외양은 그에게는 좋은 명분이었다. 그렇게나 많은 역사서를 읽고서도 분쟁으로 향하는 일련의 시퀀스를 그대로 이행했다. 그는 미안하다며 "가서 연락할게"라고 말하고는 떠났다. 그 뒤로 몇 주는 지났지만 그의 번호로 연락이 오는 일은 없었다. 몇 통의 해외전화가 핸드폰에 착신되기는 했지만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살과 살이 맞닿지 않은 관계.

증명되지 않은 법칙의 무위함과 날지 못하는 날개의 고고학적 가치.

앞으로 몇 년이 지나 그가 내 앞에 바로 나타나 만질 수 있게 되더라도 그의 의미는 나에게 과거와 같은 울림으로 다가올까?

거울 앞에 서서. 이를 닦는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나는 당장 목을 죄일 수 있을 것들을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먼저 떠나는 패배자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조용히 되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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