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복하는 것은 괴롭지만 도움이 된다

  "어쩌실 거예요?"

뒤에서 차분한 말투로 담담히 묻는 말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선 지는 오래 되었다.

내가 속한 마을의 최선을 위해 나는 항상 노력해 왔다.

가끔은 공리를 위해 소수를 저버려야 할 때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죄책감을 마음 속으로 삭여내고는 했지만 나는 그리 모진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모든 사라짐은 비극일 따름이었다.

  "마을 안의 썩어가는 수족을 쳐내는 것도 어려운데 저들은 너무 어려운 문제를 강요하고 있어."

커다란 활을 들고 지역을 옮겨가며 마을과 도시를 약탈하는 집단인 '이리떼'.

이리떼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는 스라소니 부족이 이른 새벽 마을의 동쪽 울타리 앞에 진을 쳤다.

  "조건 없는 항복이냐 마을의 절멸이냐. 사실상 선택권을 준 것도 아니잖아."

  "저항해 보려면 해보라는 심보겠죠. 저들은 전쟁에 익숙하고 우리는 변변찮은 무기조차 없으니까요."

마멀은 그렇게 말하며 자조하듯 손에 쥔 짧은 박달나무 몽둥이로 나의 책상을 툭툭 쳤다.

  "이걸로는 짐승이나 귀신은 쫓아내도 저 괴한들을 몰아낼 수는 없을 걸요."

  "그렇지."

스라소니의 진영을 눈으로 가늠해 보면 그 수가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다.

이리떼의 구성원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전원 싸울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싸우지 못하는 이를 변방의 마을에 버려둔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진위를 알아낼 방법은 따로 없으나 직접 목격해보니 그런 소문 내지는 추측이 가장 합리적인 안이었으리라.

  "국경에서 한참 떨어진 이 마을까지 이리떼들이 밀려오다니."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계셨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국경을 지키던 국왕군이 저들 몸에 생채기 하나 내지 않고 다 해산해버릴 줄은 몰랐지."

  "작년 말에 등조하실 때에는 그런 낌새가 없었나요?"

  "이 멍청한 나라의 조정에는 항상 바람 앞에 놓인 등불 같은 느낌이 있었지. 그래도 저들 목숨을 지켜주는 수단이니 대장군의 지휘력을 인정해주는 분위기는 아직 남아 있었어."

  "대장군은 아직 직에 남아 계시잖아요."

  "아닐 수도 있어."

  "정쟁에 휘말려 이미 돌아가셨고 그의 명망으로 간신히 돌아가던 국왕군은 외적의 침입에 곧장 와해 되었다?"

  "나는 그런 수순이었다고 봐."

나는 마멀의 얼굴을 바라보기 위해 몸을 돌려 그를 향했다.

제대로 빗지 못해 헝클어진 마멀의 곱슬머리 단발의 푸석푸석한 머릿결은 마멀의 심리와 마을이 처한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 했다.

마멀은 무표정했으나 그 시선이 마구 요동치고 있었다.

  "마술사들의 힘을 빌릴 수는 없을까요."

  "내가 촌장이 되고 나서 그 작자들을 얼마나 괴롭혔는데. 갓난아이를 돈을 주고 데려가서는 다시 상상도 하기 싫은 비참한 실험들이나 하는 족속들과 타협할 바에야 이리떼들에게 내 두 팔을 자르고 달려가서 저들 수장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게 낫겠어."

  "촌장님은 정말 그러실만한 분이죠."

  "그리고 걔네들은 이 난국을 타개할 정도로 강력하지 않아. 비열하기만 한 녀석들. 원소술사라면서 할 수 있는 건 고작 입으로 불덩이를 내뱉는 것 정도일 뿐이야."

  잠시 감정적으로 나쁜 말을 마구 내뱉다가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다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어요. 이제 어쩌실 거예요?"

  "패배할 게 분명한 전쟁은 애당초 해서는 안 돼."

  "그럼 항복하시는 거네요."

  "저녁을 준비해. 너무 화려한 찬으로 꾸리진 말고. 대신 저들이 세 끼는 먹을 만큼 양을 많이 만들어."

  "소를 다섯 마리 쯤 잡고 빻아놓은 밀가루는 전부 빵으로 구우라고 할게요. 사과는 상에 올릴까요?"

  "한 궤짝 정도만. 이리떼가 북부 지방을 벗어나는 건 드문 일이니까 과일이 생소할 거야. 일단 먹여보고 더 달라고 하면 그 때 내놓는 게 모양새가 좋아."

  "네, 준비할게요."

마멀은 곧장 돌아서서 방을 나서려다가 문득 멈춰서서 다시 나를 향했다.

  "사람들은 따로 모으지 않아도 될까요. 마을이 이제 이리떼의 손에 떨어지게 되는데 한 말씀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내가 시킨 일을 마을 사람들에게 전하면 다들 눈치를 채. 그거면 될 거야."

입을 꾹 다문 채로 바라보는 마멀의 시선이 차갑다. 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어차피 저들이 코앞까지 들이닥친 그 순간부터 난 더 이상 촌장이 아닌 거야."

어차피 촌장직은 혈연으로 물려받은 것. 본래 나의 것이 아니었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했을 따름이다.

  "이제 내 임무는 하나야. 적장에게 홀로 나아가서 최대한 많은 목숨을 살려달라고 구걸하는 것."

손사래를 치며 마멀에게 물러가라는 의사를 보이고 나는 스스로에게 설득하듯 재차 말했다.

  "마을 아이들이 노예로 팔려가지 않도록 최대한 비굴해져야겠어. 옷 좀 비루하게 챙겨 입을 테니 잠시 자리 좀 비켜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