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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히다 ('15. 1. 31 ~ 2. 1 작성) 본문

소설/습작

갇히다 ('15. 1. 31 ~ 2. 1 작성)

쿠프카 2015. 6. 8. 0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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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히다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밖에는 아무도 없는지 반응이 없었다.


  방안은 어두웠지만 아주 캄캄하지는 않았다. 문틈 사이로 문밖의 빛이 새어들었다. 구석진 곳은 그림자가 짙어 직접 벽에 손을 대고 한 바퀴를 빙 돌아서야 방이 생각보다도 더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갇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렇다는 것쯤은 판단하기 어렵지 않았다. 혹시나 몰라 문고리를 더듬어 돌려보았지만 문은 잠겨있었다. 문에서 두 걸음 떨어져서 바닥에 앉았다. 융단이 깔려 있는지 푹신푹신했다. 영영 나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차분한 정적이 이곳에는 있었다.


  그래서 역으로 편안하기도 했다. 이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조건으로 스스로 이 방에 들어왔다. 처음에 이야기가 나왔을 때는 너무 수상쩍어서 무시했었던가. 아무런 조건도 없이 ‘모든 고통을 잊게 해주겠다.’며 찾아오는 상담원이라니, 믿겨지지 않았다.


  하지만 순순히 믿고 싶었던 약한 마음이 있었다. 상황이 너무 좋지 않았다. 밀린 방세와 가을 철새가 퍼트린 듯 전염병처럼 퍼진 자신에 대한 나쁜 평판. 그 결과로 구해지지가 않는 일자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비를 벌어봤지만 약간의 저축을 빼고는 전부 자신을 위해 소비했던 그간의 생활에는 넉넉지 않았다.


  만족 없이 하루하루 살아가기만 하는 삶.


  싫었다.


  싸구려 종이로 찍어냈는지 손이 베일 정도로 얇은 명함을 들고 낯선 그를 찾아갔을 때, 사이비 종교를 믿는 마음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지독한 어리광이었다. 열심히 노력했는데도 안 된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의미다. 이토록 고통 받았던 대가로 우연찮은 행운 하나정도는 받아도 돼. 머릿속 생각 테이프는 그런 현실성 없는 자기합리화를 거듭 재생했다.


  너무 일찍 성공했던 탓일지도 몰랐다. 성공이라고 해도 고작 거창한 발명 하나로 안정적인 직장이 생겼다는 것 정도였다. 세계 유일의 기술자로서 스스로의 특권을 이용해 남들에게 해를 가한 적도 없었고 약간의 타성에 젖어 있었을 뿐. 한 달에 다 써버리기도 힘든 돈을 만지게 되면 조금쯤 빈둥거려도 되는 것 아니었나. 그런 안일한 생각이 이곳에 처박히게 된 단초가 됐다. 앞날을 준비하지 않은 탓이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뇌 속의 기억을 자신만이 열 수 있는 암호화를 통해 데이터화 하는 기술.


  처음 학회에 논문을 올렸을 때는 다들 무명의 대학원생이 이름을 알려보려고 거창한 제목을 들이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도로 기술적인 논문내용을 보고 화창한 날 소나기 내리듯 질문공세가 쏟아졌다. 이제는 용도의 문제였다. 도의적인 잣대를 들이댔다. 이 엄청난 기술은 어떻게 사용할 것이냐. 인간 존엄을 침해한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연구를 마친 사람에게는 짜증나는 잔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잔소리는 대부분 제대로 논문을 읽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괜한 소리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분명히 메커니즘 상으로 문제는 없다. 양자화된 데이터는 자신만이 열람할 수 있게 되어있고 그 외의 방법으로는 데이터화가 불가능하다는 표본연구도 부첨하지 않았던가. 비판을 과학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연구가 정당하다.”라는 대답이 성의 없이 들렸을까. 하지만 연구 상의 문제가 없는데 고개를 숙이며 저자세로 나갈 생각은 절대 없었다.


  못마땅한 기술을 무너뜨리기 위해 대중의 비평가들이 헛소문을 퍼트렸을지도 모르지만. 누군가를 싫어하지는 않기로 했다. 욕하고 저주하는 그런 행동 하나하나가 삶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한 잔의 술을 더 마시도록 하고 괜한 눈물이 흘렀다. 다 싫어졌다. 그래서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던가.


  그만 끝내고자 했던 적도 몇 번 있었지만 단순히 생리적으로 싫었다. 학사시절 때 친구 손에 붙들려 딱 한 번 해부실습에 참가한 적이 있었지만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밀려드는 구토감에 실습실을 뛰쳐나왔다. 죽음은 징그러웠다. 그런 징그러운 최후를 자기 스스로 맞이한다는 것 자체에 구역질이 났다.


  여전히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빛은 어렴풋이 문틈사이에서 물결치며 새어들었다. 앉아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과거를 돌이켜보거나 변화무쌍한 빛의 파동을 셈하는 것. 이대로 누워서 잠드는 수도 있다. 제 때 밥은 줄지 의문이었다. 왜 가뒀는지조차 알 방법은 없었다. 이런 어둠 속의 감금이 나의 고통을 어떻게 치유한다는 것인지. 상식적으로도 과학적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체념하기로 하지 않았던가. 삶이란 그런 불확정성과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라고.


  밖은, 세상은 무섭다.


  현상을 이해하려고 자기 나름의 엉터리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들과 그런 그들을 막아설 수 없는 연약한 개인. 과학이라는 명목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자신은 세상에 있어 조화롭지 못한 돌연변이에 지나지 않았던가.


  차라리 이곳에 갇혀 아무에게 들키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됐다. 어떤 시선에도 흔들리지 않고 혼자만의 삶을 지킬 수 있다면. 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일어서서 재차 문을 두들긴다. 밖에 아무도 없나요.


  대답 없이 정적만이 길게.



 

  조용한 어둠 속에서 ‘나’는 겨우 눈물을 흘리며 안도했다.







  - 여전히 저번 습작과 마찬가지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불분명하기 때문에 조악.

  - 습작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야기의 완결성을 띠기 위한 뚜렷한 방향이 있어야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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