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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습작

바람은 너를 잊으라고 했다

쿠프카 2019. 7. 5.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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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너를 잊으라고 했다.

자신이 몰래 온 세상을 쏘다니듯 너 역시 몸 없는 정신으로의 세계일주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나의 기다림을 무위라고 단정지었다.

그럴리가. 아니야. 부정을 되뇌어도 확신은 없다.

결국은 잊히고 마는 사람이기에. 망각은 삶이며 역사이며 그렇게 사람이었다.

하늘이 높아서 바람 다닐 길이 너무나 많은 가을날.

기력이 쇠하여 홀쭉해진 가로수 아래에는 부산스레 목도리를 두른 여학생이 이어폰을 끼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면 어떤 시간이 오기를 고대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나와 마찬가지였다. 잊을 수 없는 무엇을 위해 마음을 향한다는 것이 같았다. 어서 떠나가기를 바랐다. 그녀의 해후로 나의 마음마저 위로를 얻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

바람은 하릴없이 우리를 스치었고 시간은 여전히 그 자리 그대로였다.

그리고 너는 여전히 없다. 지상의 인연은 하늘까지 맞닿아 있지 않은 모양이었다. 육신으로서의 접점을 내려놓고서는 도저히 기억할 수 없는 것이 인생의 허망함인가. 영혼은 나를 잊었는가. 자연은 나를 잊었는가. 풀과 꽃, 나무와 미물. 말 없는 것들.

…그리고 너는.

바람은 떠나간 이를 잊으라고 했다.

그럴 수야. 절대로. 그런 부정을 거듭 읊조린대도.

나의 의중을 이해할 이는 너를 잠시 스쳐갔을지 모를 한 줄기 바람 밖에 없음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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