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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습작

등속소년

쿠프카 2020. 8. 21.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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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덮고 재차 교실 뒤의 금 간 시계를 돌아봤다. 12시 20분을 지나고 있었다. 마지막 수학문제를 푸느라 조금 늦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다.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느라 고생한 아들들을 위해 마중을 나온 이들 때문에  나를 제외한 모두 정시 퇴근을 참이었다.

 빈 교실에서 소년은 가벼운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위해 빨리 교실은 나서야 하는 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쯤은 함께 교실을 나서기 위해 나를 기다려줘도 될 텐데.

 그런 비논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을 하며 소년은 도망치듯 교실을 나섰다. 어차피 7시간 쯤 지나면 다시 이 교실로 잠에 취한 채 터벅터벅 돌아올 테니 가방을 필요도 없다. 그래도 소년은 굳이 가방을 툭툭 고쳐 메면서 형광등을 끄고 교실을 나섰다. 12년 동안 등하교를 때면 항상 가방을 멨다. 학교에 다니고 있는 나는, 가방을 들고 다녀야만 해.

 빈 가방의 무게와 달리 소년의 발소리는 조금 무거운 소리를 냈다. 가을이 되어 공기는 조금 차갑고 온통 새까맸다. 소년은 밤하늘이 비치는 오른편 창문 너머를 올려다보았다. 달은 보이지 않아도 달빛은 하늘을 수놓고 있었다. 소년은 하늘을 바라보며 복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별빛도, 인공의 반짝임도 없는 오로지 흐릿하면서도 새하얗게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면서 소년은 마지막에 풀어낸 수학문제를 떠올려내고 있었다. 문제의 해를 풀어냈지만 정답을 맞추지는 못했던 문제를.

 터벅터벅.

 소년의 발소리는 복도에 가라앉은 먼지를 요란스럽게 깨워댔고 먼지는 잠에서 깨어나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달빛은 하늘에서 지상으로, 소년이 계단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복도까지 이르러서 눈을 연신 비벼대는 먼지의 뺨을 툭툭 치고선 가벼운 춤을 함께 추었다. 소년은 먼지와 달빛의 무도회장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이미 복도를 지나 계단에 도착했기 때문이었다. 문득, 아무 상념 없이 소년은 뒤를 돌아 어두운 복도를 잠시 바라보았다. 복도에는 새까만 그림자가 내려앉고 먼지는 그 어둠에 몸을 숨겼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어느새 짙은 구름이 달을 드리우고 있었다. 

 소년은 계단을 내려간다.

 빈 가방이 들썩거리면서 리드미컬하게 내려가는 발소리와 화음을 이룬다. 하나, 둘. 소리에 맞춰 수를 세다보면 아래층까지 스물일곱 개의 계단이 놓여 있다는 것을 자연히 알게 된다. 방금 문제의 해를 풀어냈지만 정답을 맞추지 못했던 문제의 정답은 27이었지만 계단의 수와는 전혀 연관이 없을 것이 당연했다.

 소년은 유리로 출입문을 밀어 밖으로 나섰다.

 서늘한 가을 바람이 불어왔다.

 

 살아가면서 명확한 목적의식이 없는 내게 유일한 취미는 산책이었다.

 아무래도 좋을 생각을 하면서 일정한 보폭으로 하릴없이 걷는 것이 좋았다. 출발부터 끝까지 내가 의식하는 선에서 결코 느려지지도 빨라지지도 않는 등속으로 나아간다. 누군가에게 뒤쳐지지도 누군가를 앞서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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