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과 번역의 코티지

요루시카 1st, 2nd 미니앨범 속 시어와 짧막한 코멘트 본문

공통/감상

요루시카 1st, 2nd 미니앨범 속 시어와 짧막한 코멘트

쿠프카 2020. 6. 6. 07:55
반응형

0. 첫번째 풀앨범 발매 즈음인 4월부터 작성된 것이라 다듬어지지 않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노래를 듣다가 가끔 수정하고 싶을 때를 위해서 블로그에 새로 작성합니다.

 

작품 속에야말로 하느님이 깃든다. 그것이 그의 말버릇이었다. 우리들 인간 안에는 결단코 없으며 인간이 만들어 낸 작품의 안쪽이 아니고서는 존재할 수 없다. 하느님이 깃든 작품은 무수히 존재하지만 하느님이 깃든 인간따위 한명도 존재하지 않으니 그렇기에야말로 손이 닿지 않는 위치까지 나아가버린 그것을 우리는 숭배하듯 접하는 것이라고. 지금도 기억한다. 비가 흐르는 창가에서 손가락을 미끄러뜨리듯 일기장의 뒤편을 어루만지던 그. 그는 언제나 추억 속을 살아가고 있었다. - 엘마의 일기장에서

 

※ 전제 1 : 요루시카 명의의 모든 노래가 시적 형상화를 유사하게 가져간다.

※ 전제 2 : 모든 곡의 작곡가는 한 명 (엘마), 가사 속 화자의 경우는 엘마와 상이할 수 있지만 엘마가 에이미의 심정을 적극적으로 추론한 결과로 볼 수 있음

 

배경 유추 포인트

그날의 여름, 정류장

코모레비 

그저 너에게 맑아라 2:54 부분

 

1. 반영론적 해석 방향

나부나 본인의 예술지상주의적인 페르소나와 그것을 정제하여 보다 대중적인 종합예술(영상) 창작으로 나아간 이른바 '엘마'의 페르소나의 대결. 일말의 화해 제스처 없이 에이미 죽음이라는 플롯으로 향한 것은 과거 오스카 와일드, 시 등 문예적인 것에 지속적인 관심을 보였던(편지, 쪽빛제곱 등에서 나타남) 시인으로서의 자신과 결별하고 보다 음악이나 영상으로서의 창작에 골몰해야 함을 인정함과 동시에 과거의 창작물이나 자신의 태도에 대한 그리움을 내포하고 있는 것

 

2. 미니앨범 1st, 2nd 각 트랙 속 시어 및 간단한 코멘트

 

*'19.08.31 : 풀앨범 이후 혼자 남겨진 엘마의 창작이라고 전제

화자의 구분이 모호한 것이 특징

*곡 제목 옆에 적는 임의의 화자 구분은 지극히 편의적이니 무시해도 무방

 

미니앨범 1st

 

1. 여름 그림자, 피아노를 치다

2. 카틀레야 : 엘마 -> 에이미 (카틀레야)

  - 당신을 알지 못해, 같은 건 오만이야 (1st 풀앨범 특전 속 편지)

  - 앞으로 죽을 때까지 당신이 없다는 것

  - 배경 시어 : 도쿄, 돈다발(돈에 대한 강박), 창가의 꽃병

3. 말해줘 : 엘마 -> 에이미

  - 맹목적, 맹동적, 충동적, 초조적, 소극적 : 열거법 (1st 풀앨범에서 나타남, 에이미에 대한 리스펙트?)

  - 앞으로 죽을 때까지 당신이 없다는 것

  - '잇떼'는 동음이의어로서의 의미와 동시에 에이미가 아닌 자신에게 향하는 것이기도 함 (진작 이야기할 걸, 진작 에이미에게 더 과감하게 다가갈 걸)

  - 2nd 풀앨범 부록 엘마의 일기장에서 에이미의 스웨덴 행 관련 디테일과 나름 관련 있음

4. 그 여름에 피어나 : 모호, 카틀레야

  - 카틀레야는 엘마, 에이미가 서로 함께 행복했던 여름의 추억 속 서로를 투사하는 상징

    (각자 카틀레야를 보고 서로를 떠올렸다는 뜻)

  - 배경 시어 : 버스 정류장, 여름, 비

5. 비행

6. 구두의 불꽃 : 모호하지만 엘마의 속마음에 가까움

  - "쏙독새의 별" 속 이야기를 통해서 서로의 관계에 대해 노래하는 곡

  - 배경 시어 : 네가 있던 거리, 꽃, 여름

7. 구름과 유령 : 모호

  - 행간의 공백이 무척 커서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할 여지가 있음

  - 배경 시어 : 멀리 있는 너, 여름이 끝나는, 다다미 6장, 버스 정류장, 밤 뿐, 거리 등

 

미니앨범 2nd

 

1. 전세

2. 패배자에게 앵콜은 필요 없어 : 엘마 -> 에이미

  - 에이미의 언더독 기질을 힐난하듯 쿡쿡 찌르는 노래이면서 왜 엘마가 에이미를 좋아했는지에 대한 고백

  - 엘마 자신을 향하는 노래이기도 하다

  - '벌써 몇 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를 테지', '너 외에는 아무래도 좋아', '위선자' 부분이 흥미로움

  - 엘마의 일기장과 대조해보면 의미가 무척 커지는 노래

3. 폭탄마 : 엘마 독백

  - 에이미에 대한 직설적인 고백

  - 優しさ라는 단순한 시어가 엘마의 일기장과 엮이면 꽤 울림이 있다

  - '너 자신은 말없이 사라진 주제에' 라는 부분도 일종의 복선 같은 느낌

4. 히치콕 : 엘마 독백

  - 상실을 치유할 방법이 없어

  - 에이미를 노래하기 위한 '엘마'이지만 그를 노래 속에 투영하는 삶을 살아가면서도 '나'의 생활 속 현실적인 문제와 마주해야 함을 드러내고 있는 노래

  - 배경 시어 : 돈, 사상가(니체, 프로이트), 여름이 멀다, 당신만을 알고 싶다, 노을

5. 낙하

6. 준투명 소년 : 에이미 독백 엘마 독백

  - 제목의 소년이라는 적나라한 단어 때문에 2nd 풀앨범을 받아보기 전에는 에이미의 심정을 대변하는 가사라고 생각했으나 '나'를 지우고 그저 '엘마'로서 그날 네가 노래했던 노래를 노래한다는 선언과 너(에이미)를 통해서만 노래한다는 가사에서 엘마 본인의 의지가 나타난다

  - 시어를 꾸며낸다기보다는 직접적인 언어로 자신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음

7. 그저 네게 맑아라 : 엘마 독백

  - "사진 따위 종이조각이야" 부분이 흥미로움

  - '네가 바라는 대로 손뼉을 쳐', '너의 추억을 곱씹고 있을 뿐'

  - 배경 시어 : 버스 정류장, 그 여름, 토리이, 마른 구름, 여름 냄새, 저무는 해, 산앵두, 녹슨 표식 등등 엄청 많음

8. 동면 : 엘마 독백

  - "하느님 따윈 없으니까" 부분은 1st 풀앨범에 대한 언급

  - '너를 기다린다'는 언급에서 2nd 미니앨범 전반의 후회, 애증의 감정을 넘어서서 에이미의 죽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엘마 본인의 태도가 살짝 드러남

  - 배경 시어 : 불꽃, 여름 냄새, 구름과 바람 등등

 

 

20.6.6(토)

요루시카 앨범의 "자기복제" 비판과 이 글의 해석 방향에 대해서

 

요루시카 노래를 들으면서 (조금 래디컬하지만) 내가 모든 요루시카 명의의 곡을 '엘마'라는 가상의 작곡가로 추정하고 노래를 해석하는 이유는 사실 몇몇 리스너들이 "자기복제"라는 화두로 나부나의 요루시카 시리즈를 비판하는 지점과 맞닿아 있다. 이 글 서두에서 전제 1, 전제 2로 언급하고 있듯 이상할 정도로 요루시카 명의의 곡들은 같은 배경, 시어, 주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창작 경향을 나부나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더라면 혹은 이러한 경향이 듣는 이에게 납득될 수 없었다면 당연히 이는 충분히 자기복제의 영역이다.

하지만 일부 "자기복제"라는 화두로 요루시카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경우 나부나의 창작 측면을 스스로 핀셋으로 집어내듯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다.

동일한 악곡과 가사가 의미 없이 반복되는 창작은 예술적이지 않다고 정의할 수 있다. 충분히 이해가 되는 비판이다.

자기복제가 예술적이지 않은 이유는 너무 편의적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창작자의 심상을 반영한 것.

창작자 개인은 시대정신이 흘러감에 따라 매 순간 감정과 생각이 바뀌기 마련이다.

그것을 충분히 창작물에 녹여내야만 치열한 예술가 정신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다.

자기복제라고 비판하는 이들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노래를 예술로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일 테다.

그러나 맥가이버 칼마냥 예술을 바라볼 때 어디에나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는 방법론은 없다.

작곡가가 악곡, 가사, 주제가 거의 완벽히 똑같은 A파트를 매 앨범에서 계속 반복하는 것은 기법적으로 말도 안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전위시의 동어반복이라면?

아니면 연인을 잃고 반쯤 미친 이가 마치 타임루프를 하는 것처럼 한 추억을 계속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하는 내용의 소설이라면?

그런 작품 속에서 창작자가 한 Theme을 계속해서 반복하는 것이 예술적이지 않는 걸까.

결국 나부나가 창작하는 요루시카 명의의 곡은 결국 노래 자체만이 아니라 일련의 서사를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여기서 말한 서사는 단순히 음악이라는 한 장르를 넘어서서 유튜브 영상 속 미장센이나 작품의 '서정적이지 않은' 부분까지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불친절하다는 것에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서사 전반을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도 요루시카의 곡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그런 의도 역시 충분히 반영한 작품이니까.

 

요루시카의 곡은 핵심적인 주제가 모호하고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하게 형상화하고 있지 않다.

표면에서 드러나는 시어나 배경의 시적 형상화는 매우 세밀하지만 그것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를 명명백백하게 말하지 않는다.

노래 속에서 수많은 감정을 교차시키지만 쉽게 그 감정이 향하는 대상까지 우리를 인도하지는 않는다.

사실 이건 요루시카만이 아니라 나부나 본인의 창작 경향이긴 한데...

아무튼 그렇다면 모든 요루시카 곡의 핵심 주제는 모호하고 감성적인 뜬구름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나는 충분히 풀어서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서사적인 핵심 주제가 있다고 본다.

몇몇 이들이 자기복제라고 비판하는 지점 역시 나는 일종의 서사적 '기법'으로서 나부나가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감상글에서 나는 내심 이러한 자기복제 내지는 동어반복의 기법에 대해서 강신降神이라는 키워드에 손을 들어주긴 했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결국 나부나 본인만 명확하게 알고 있을 것이다.

영영 가르쳐 주지 않을 수도 있고.

결국 작품은 그것을 수용하는 이에게 전적으로 던져지는 것이니까.

 

암튼 자기복제라는 맥락으로 "나부나의 창작 경향이 편의적인 것 아니냐"는 비평에 대해 몇 자 적어봤다.

나부나가 편의적이다? 그렇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기저에 의도를 많이 까는 창작자가 아닐까.

개인적으로 꽤 오랫동안 곡을 접하면서 느낀 나부나는 고민을 많이 하는 창작자다.

그러니 나도 좀 예의를 갖춰서 나도 고민을 많이 하면서 들어야지...

 

 

한편,

이 글을 적으면서 내가 음알못이라는 생각을 다시 떠올렸다.

자기복제라는 게 진짜 멜로디라든가 악곡 자체를 음악적으로 말도 안되게 카피한다는 건가?

사실 그 지점은 모르겠어...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