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습작 7

등속소년

책을 덮고 재차 교실 뒤의 금 간 시계를 돌아봤다. 12시 20분을 지나고 있었다. 마지막 수학문제를 푸느라 조금 늦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다.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느라 고생한 아들들을 위해 마중을 나온 이들 때문에 나를 제외한 모두 정시 퇴근을 한 참이었다. 빈 교실에서 소년은 가벼운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위해 빨리 교실은 나서야 하는 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한 명 쯤은 함께 교실을 나서기 위해 나를 기다려줘도 될 텐데. 그런 비논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을 하며 소년은 도망치듯 교실을 나섰다. 어차피 7시간 쯤 지나면 다시 이 교실로 잠에 취한 채 터벅터벅 돌아올 테니 빈 가방을 멜 필요도 없다. 그래도 소년은 굳이 가방을 ..

소설/습작 2020.08.21

미미

네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어. 단 한 번도 만화처럼 말을 걸어준 적이 없었으니까.  다소곳이 의자에 앉아 빤히 나를 지켜보는 너. 이마를 툭 건드려본다. 미동조차 없었다.  너의 영혼이 여기 없다는 것을 바보같이 이제야 깨달았다. 대낮에도 항상 어두웠던 방안. 나는 내가 어둠과 닮아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 왔지만 실은 진실과 마주하기 싫어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커튼을 걷어낸 환한 원룸은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더러웠다. 우선 청소를 했다. 썩은내 나는 라면용기와 레토르트 카레를 쓰레기봉투에 담고 곰팡이 슨 옷가지를 밖으로 내놓았다. 그제야 바닥을 보이는 장판에 락스로 문대어 정체모를 오염을 씻어냈다. 생각보다 청소는 빠르게 진행됐고 그 까닭은 나의 부지런함이 아니라 오직 원룸이 너무 작아서였다. ..

소설/습작 2019.07.05

겨울 직전의 아이스크림

시퍼렇게 쏟아지는 추운 빗줄기는 세상을 적시어 어서 빨리 기온을 낮추고 겨울이 찾아오도록 계절을 재촉하는 중이었다. 그 사이를 지나야만 해서, 마음은 방안에 콕 틀어박힌 채 미동도 하기 싫었지만 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밍기적대면서도 장우산을 펼쳐들고 집을 나섰다. 장을 봐와야 했다. 하필이면 이런 날 먹을 것이 떨어지나. 궁시렁대며 슈퍼로 가는 길은 물웅덩이를 피하고 지나는 차가 흩뿌리는 물세례를 온갖 방법으로 막아내는 비와의 사투였다. 옷 버리기는 싫다. 그렇다 해서 열과 성으로 빗방울을 피하려 안달하는 것 역시 보기 흉했다. 어서 겨울이 된다면 이런 걱정도 없을 터였다. 눈송이가 어깨에 내려앉아도 툭툭 털어내면 그만이었다. 지금 내리는 비는 세상을 눅눅히 적실 뿐만 아니라 괜히 사람을 우울하게 했다. ..

소설/습작 2019.07.05

바람은 너를 잊으라고 했다

바람은 너를 잊으라고 했다. 자신이 몰래 온 세상을 쏘다니듯 너 역시 몸 없는 정신으로의 세계일주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나의 기다림을 무위라고 단정지었다. 그럴리가. 아니야. 부정을 되뇌어도 확신은 없다. 결국은 잊히고 마는 사람이기에. 망각은 삶이며 역사이며 그렇게 사람이었다. 하늘이 높아서 바람 다닐 길이 너무나 많은 가을날. 기력이 쇠하여 홀쭉해진 가로수 아래에는 부산스레 목도리를 두른 여학생이 이어폰을 끼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면 어떤 시간이 오기를 고대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나와 마찬가지였다. 잊을 수 없는 무엇을 위해 마음을 향한다는 것이 같았다. 어서 떠나가기를 바랐다. 그녀의 해후로 나의 마음마저 위로를 얻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 바람은 하릴없이 우리를 스치었고 시..

소설/습작 2019.07.05

사르트르를 등지고

밀려오는 배신감은 체내에서 맴돌며 터져나올 구멍도 없이 마음을 갉아먹고 있었다.서럽게 울며 미친듯이 소리친다 해도 편의점에서 사다 입에 털어넣는 소염진통제처럼 흔한 대증요법도 되지 못한다. 다들 그렇게 실연을 잊어간다고들 하지만 결국 모두가 마지막에 삼키고 마는 투박한 알약의 이름은 시간일 테니까.각지의 언어로 노래하고 시대를 넘어 고전과 현대를 잇는 연속된 플롯 속에서 읽어냈던 사랑에 대한 이야기에서 나는 참 많은 걸 배웠지만 고작 한 연애의 끝자락에서는 너무나 연약하고 바보처럼 행동했다. 아무래도 쉬이 잊고 털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이렇게나 가볍게 떠나버리다니. 지금껏 함께 했던 시간은 무엇이었을까. 함께 웃고 많이 싸우고 가끔 울었던 기억들. 한 줌의 바보같은 먼지로 날아가버릴 추억이었다...

소설/습작 2019.02.15

갇히다 ('15. 1. 31 ~ 2. 1 작성)

갇히다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밖에는 아무도 없는지 반응이 없었다. 방안은 어두웠지만 아주 캄캄하지는 않았다. 문틈 사이로 문밖의 빛이 새어들었다. 구석진 곳은 그림자가 짙어 직접 벽에 손을 대고 한 바퀴를 빙 돌아서야 방이 생각보다도 더 작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갇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렇다는 것쯤은 판단하기 어렵지 않았다. 혹시나 몰라 문고리를 더듬어 돌려보았지만 문은 잠겨있었다. 문에서 두 걸음 떨어져서 바닥에 앉았다. 융단이 깔려 있는지 푹신푹신했다. 영영 나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니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세상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차분한 정적이 이곳에는 있었다. 그래서 역으로 편안하기도 했다. 이제 괴로워하지 않아도 된..

소설/습작 2015.06.08

「」 는 이름이 없다

「」 는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어서 그가 불편했던 점은 다른 누구에게 자신을 소개하기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목소리가 유래없는 미성이라고 생각해 왔고 그런 멋진 목소리를 칭찬받고 싶었지만 남들 앞에만 서면 발끝이 아려왔다. 찌릿하고 전류에 닿은 듯 오른발 새끼발가락부터 왼발 새끼발가락까지 열 차례 경련이 나는 것이었다. 고통은 심하지 않지만 예고하지 않은 고통이다보니 그로서는 깜짝 놀랄 일이었다. 무심코 그는 온몸을 움츠리고 만다. 그리고 이 때 그는 상대에게 말을 걸 타이밍을 잃어버리고는 했다.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삭이기는 그로선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는 저 멀리서 온 작은 유성이었다. 지구에 와서 첫 몇 개월은 누군가와 단 한마디도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그의 외견이 얼핏 보면 ..

소설/습작 2015.05.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