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장르 5

하고 싶은 일 (작성 중)

목요일 오후, 한 주의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세리시아는 자신의 옆을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묘한 소란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저녁밥을 어떻게 해결할지 골몰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면서 세상은 주홍빛을 띤다. 오랜만에 올려다 본 맑은 하늘은 햇빛에 젖어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드문 미소가 세리시아의 입가에 저절로 떠올랐다. 오늘은 괜히 기분이 좋은 날. 문득 냉장고에 국거리용 고기가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다. 왠지 뜨거운 국물을 끓여내고 싶어졌다. 한 모금 들이키면 온몸이 따뜻해질만한 음식을 만들자. 고기를 넣은 매콤한 김치찌개. 따로 시장에 들러 장을 볼 필요도 없으니 편하고 좋은 선택이라고 세리시아는 생각했다. 대리석 기둥으로 세운 대학 후문을 지나 낮..

소설/장르 2020.01.17

유년의 끝

죽음에 초연해지고자 했지만 막상 다가오는 두려움 앞에선 다만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독한 진통제의 약효 사이에서 짧고 견딜만한 정도로만 왕래하는 격통. 흐릿한 의식 속에서 단 하나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건넨다. '정말 이게 마지막일까?' 수도없이 자문했지만 희망은 없었다. 이미 나는 죽어가고 있다. 추락 이후, 머리는 다치지 않았지만 머리 아래의 모든 신체는 지면과의 충격에 짓눌려 엉망이었다. 간신히 형태를 붙들고 있지만 만에 하나 기적처럼 의식을 되찾고 기력을 회복한다 해도 앞으로의 나의 삶은 예전같지 않을 게 뻔했다. 제대로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나는 좌절할 테지. 나쁜 감정들이 머릿속을 휘몰아치며 이내 호흡을 어지럽힌다. 가쁜 호흡을 그대로 두고 나는 생각했다. ..

소설/장르 2019.12.24

전투 직전의 잡담

한 무리의 화살이 머리 위를 지나 후위의 진영으로 날아간다. 바람을 꿰뚫는 기묘한 소리. 끔찍한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전투를 치루면서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온갖 괴성과 격음 사이에서도 저 화살의 비가 내는 소리만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히아신스 연합왕국이 유독 궁수대 양성에 공을 들였나봐." 자신의 직속 휘하로 있는 열다섯의 정예병은 사진의 혼잣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오랫동안 함께 훈련한 동지들이었지만 생생한 전투의 압박감 속에서 이들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궁수는 확실히 위협이지만 활시위를 당기다보면 저들은 금방 지쳐. 화살도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고." "공왕工王이 적진에 있다면 화살은 끊임없이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스스럼없는 성격 덕에 모두에게 인기가 좋..

소설/장르 2019.12.09

항복하는 것은 괴롭지만 도움이 된다

"어쩌실 거예요?" 뒤에서 차분한 말투로 담담히 묻는 말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선 지는 오래 되었다. 내가 속한 마을의 최선을 위해 나는 항상 노력해 왔다. 가끔은 공리를 위해 소수를 저버려야 할 때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죄책감을 마음 속으로 삭여내고는 했지만 나는 그리 모진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모든 사라짐은 비극일 따름이었다. "마을 안의 썩어가는 수족을 쳐내는 것도 어려운데 저들은 너무 어려운 문제를 강요하고 있어." 커다란 활을 들고 지역을 옮겨가며 마을과 도시를 약탈하는 집단인 '이리떼'. 이리떼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는 스라소니 부족이 이른 새벽 마을의 동쪽 울타리 앞에 진을 쳤다. "조건 없는 항복이냐 마을의 절멸이냐. 사실상 선택권을 준 ..

소설/장르 2019.07.24

콜라는 다 맛있어

"아니야." 구연산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가리지 않고 마셔. 각자 나름의 풍미가 있다고 생각해." "미친 소리 하지 마." 마시던 빨간색 캔 콜라를 원형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구연산은 소파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얘, 사람은 항상 이데아를 찾으려 노력해야 해. 비록 우리가 동굴 안에서 태양을 등진 채로 묶여서 세계의 그림자만 보고 있다 하더라도 분명 원형이라는 건 존재해." 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꽉 붙잡고는 강제로 탁자에 시선을 향하도록 한다. "저게 콜라의 본질이야, 알았어?" "누가 보면 플라톤의 화신인 줄 알겠어." "철학가라면 누구나 플라톤이 되어야지." 아니면 나처럼 전과하던가. 구연산은 다시 터벅터벅 소파로 돌아가 앉으며 빨간 콜라를 집어들고서는 다시 들이켰다. 나는 마음 속으..

소설/장르 2019.05.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