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13

등속소년

책을 덮고 재차 교실 뒤의 금 간 시계를 돌아봤다. 12시 20분을 지나고 있었다. 마지막 수학문제를 푸느라 조금 늦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는 버스가 운행하지 않는다.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느라 고생한 아들들을 위해 마중을 나온 이들 때문에 나를 제외한 모두 정시 퇴근을 한 참이었다. 빈 교실에서 소년은 가벼운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가족을 위해 빨리 교실은 나서야 하는 사정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래도 한 명 쯤은 함께 교실을 나서기 위해 나를 기다려줘도 될 텐데. 그런 비논리적이고 이기적인 생각을 하며 소년은 도망치듯 교실을 나섰다. 어차피 7시간 쯤 지나면 다시 이 교실로 잠에 취한 채 터벅터벅 돌아올 테니 빈 가방을 멜 필요도 없다. 그래도 소년은 굳이 가방을 ..

소설/습작 2020.08.21

하고 싶은 일 (작성 중)

목요일 오후, 한 주의 마지막 강의가 끝나고 서둘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세리시아는 자신의 옆을 지나쳐 가는 사람들의 묘한 소란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저녁밥을 어떻게 해결할지 골몰하고 있었다. 해가 저물면서 세상은 주홍빛을 띤다. 오랜만에 올려다 본 맑은 하늘은 햇빛에 젖어 포근하고 따스한 느낌이 들었다. 드문 미소가 세리시아의 입가에 저절로 떠올랐다. 오늘은 괜히 기분이 좋은 날. 문득 냉장고에 국거리용 고기가 남아 있다는 걸 떠올렸다. 왠지 뜨거운 국물을 끓여내고 싶어졌다. 한 모금 들이키면 온몸이 따뜻해질만한 음식을 만들자. 고기를 넣은 매콤한 김치찌개. 따로 시장에 들러 장을 볼 필요도 없으니 편하고 좋은 선택이라고 세리시아는 생각했다. 대리석 기둥으로 세운 대학 후문을 지나 낮..

소설/장르 2020.01.17

유년의 끝

죽음에 초연해지고자 했지만 막상 다가오는 두려움 앞에선 다만 눈을 감고 숨을 고르며 때를 기다릴 뿐이었다. 독한 진통제의 약효 사이에서 짧고 견딜만한 정도로만 왕래하는 격통. 흐릿한 의식 속에서 단 하나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건넨다. '정말 이게 마지막일까?' 수도없이 자문했지만 희망은 없었다. 이미 나는 죽어가고 있다. 추락 이후, 머리는 다치지 않았지만 머리 아래의 모든 신체는 지면과의 충격에 짓눌려 엉망이었다. 간신히 형태를 붙들고 있지만 만에 하나 기적처럼 의식을 되찾고 기력을 회복한다 해도 앞으로의 나의 삶은 예전같지 않을 게 뻔했다. 제대로 거동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서 결국 나는 좌절할 테지. 나쁜 감정들이 머릿속을 휘몰아치며 이내 호흡을 어지럽힌다. 가쁜 호흡을 그대로 두고 나는 생각했다. ..

소설/장르 2019.12.24

전투 직전의 잡담

한 무리의 화살이 머리 위를 지나 후위의 진영으로 날아간다. 바람을 꿰뚫는 기묘한 소리. 끔찍한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전투를 치루면서 자연스럽게 들려오는 온갖 괴성과 격음 사이에서도 저 화살의 비가 내는 소리만은 아무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히아신스 연합왕국이 유독 궁수대 양성에 공을 들였나봐." 자신의 직속 휘하로 있는 열다섯의 정예병은 사진의 혼잣말에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오랫동안 함께 훈련한 동지들이었지만 생생한 전투의 압박감 속에서 이들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정신 차려. 궁수는 확실히 위협이지만 활시위를 당기다보면 저들은 금방 지쳐. 화살도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고." "공왕工王이 적진에 있다면 화살은 끊임없이 만들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스스럼없는 성격 덕에 모두에게 인기가 좋..

소설/장르 2019.12.09

항복하는 것은 괴롭지만 도움이 된다

"어쩌실 거예요?" 뒤에서 차분한 말투로 담담히 묻는 말에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위치에 선 지는 오래 되었다. 내가 속한 마을의 최선을 위해 나는 항상 노력해 왔다. 가끔은 공리를 위해 소수를 저버려야 할 때도 있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죄책감을 마음 속으로 삭여내고는 했지만 나는 그리 모진 사람이 될 수 없었다. 모든 사라짐은 비극일 따름이었다. "마을 안의 썩어가는 수족을 쳐내는 것도 어려운데 저들은 너무 어려운 문제를 강요하고 있어." 커다란 활을 들고 지역을 옮겨가며 마을과 도시를 약탈하는 집단인 '이리떼'. 이리떼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다는 스라소니 부족이 이른 새벽 마을의 동쪽 울타리 앞에 진을 쳤다. "조건 없는 항복이냐 마을의 절멸이냐. 사실상 선택권을 준 ..

소설/장르 2019.07.24

미미

네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어. 단 한 번도 만화처럼 말을 걸어준 적이 없었으니까.  다소곳이 의자에 앉아 빤히 나를 지켜보는 너. 이마를 툭 건드려본다. 미동조차 없었다.  너의 영혼이 여기 없다는 것을 바보같이 이제야 깨달았다. 대낮에도 항상 어두웠던 방안. 나는 내가 어둠과 닮아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 왔지만 실은 진실과 마주하기 싫어서 그랬을지도 몰랐다. 커튼을 걷어낸 환한 원룸은 눈살이 절로 찌푸려질 정도로 더러웠다. 우선 청소를 했다. 썩은내 나는 라면용기와 레토르트 카레를 쓰레기봉투에 담고 곰팡이 슨 옷가지를 밖으로 내놓았다. 그제야 바닥을 보이는 장판에 락스로 문대어 정체모를 오염을 씻어냈다. 생각보다 청소는 빠르게 진행됐고 그 까닭은 나의 부지런함이 아니라 오직 원룸이 너무 작아서였다. ..

소설/습작 2019.07.05

겨울 직전의 아이스크림

시퍼렇게 쏟아지는 추운 빗줄기는 세상을 적시어 어서 빨리 기온을 낮추고 겨울이 찾아오도록 계절을 재촉하는 중이었다. 그 사이를 지나야만 해서, 마음은 방안에 콕 틀어박힌 채 미동도 하기 싫었지만 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밍기적대면서도 장우산을 펼쳐들고 집을 나섰다. 장을 봐와야 했다. 하필이면 이런 날 먹을 것이 떨어지나. 궁시렁대며 슈퍼로 가는 길은 물웅덩이를 피하고 지나는 차가 흩뿌리는 물세례를 온갖 방법으로 막아내는 비와의 사투였다. 옷 버리기는 싫다. 그렇다 해서 열과 성으로 빗방울을 피하려 안달하는 것 역시 보기 흉했다. 어서 겨울이 된다면 이런 걱정도 없을 터였다. 눈송이가 어깨에 내려앉아도 툭툭 털어내면 그만이었다. 지금 내리는 비는 세상을 눅눅히 적실 뿐만 아니라 괜히 사람을 우울하게 했다. ..

소설/습작 2019.07.05

바람은 너를 잊으라고 했다

바람은 너를 잊으라고 했다. 자신이 몰래 온 세상을 쏘다니듯 너 역시 몸 없는 정신으로의 세계일주를 하고 있는 것이라면서 나의 기다림을 무위라고 단정지었다. 그럴리가. 아니야. 부정을 되뇌어도 확신은 없다. 결국은 잊히고 마는 사람이기에. 망각은 삶이며 역사이며 그렇게 사람이었다. 하늘이 높아서 바람 다닐 길이 너무나 많은 가을날. 기력이 쇠하여 홀쭉해진 가로수 아래에는 부산스레 목도리를 두른 여학생이 이어폰을 끼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면 어떤 시간이 오기를 고대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나와 마찬가지였다. 잊을 수 없는 무엇을 위해 마음을 향한다는 것이 같았다. 어서 떠나가기를 바랐다. 그녀의 해후로 나의 마음마저 위로를 얻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 바람은 하릴없이 우리를 스치었고 시..

소설/습작 2019.07.05

콜라는 다 맛있어

"아니야." 구연산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가리지 않고 마셔. 각자 나름의 풍미가 있다고 생각해." "미친 소리 하지 마." 마시던 빨간색 캔 콜라를 원형 탁자에 내려놓으면서 구연산은 소파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얘, 사람은 항상 이데아를 찾으려 노력해야 해. 비록 우리가 동굴 안에서 태양을 등진 채로 묶여서 세계의 그림자만 보고 있다 하더라도 분명 원형이라는 건 존재해." 나의 얼굴을 두 손으로 꽉 붙잡고는 강제로 탁자에 시선을 향하도록 한다. "저게 콜라의 본질이야, 알았어?" "누가 보면 플라톤의 화신인 줄 알겠어." "철학가라면 누구나 플라톤이 되어야지." 아니면 나처럼 전과하던가. 구연산은 다시 터벅터벅 소파로 돌아가 앉으며 빨간 콜라를 집어들고서는 다시 들이켰다. 나는 마음 속으..

소설/장르 2019.05.21

분수에 맞지 않은 사랑 (나중에 쓸 것)

착각계. 대학생. 적당히 마셔. 짧게 울리는 알람. 적당히 확인하고 곧장 스마트폰의 화면을 꺼버린다. 그에게 혼술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서는 안됐다. 주사를 부리는 근처 대학 사람들로 부산스런 밤이었다. 오늘따라 그냥 바깥 소음이 유난히 신경쓰였다. 잠시 누워보려고도 했지만 도통 잠들 수 없어서 꺼진 천장의 LED 등을 켜고 방 안을 밝혔다. 현성은 삶의 관성에 이끌려 작은 원룸 속 이부자리와 가재도구를 병적일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편이었다. 다만 책상 위는 항상 어지러웠다. 두서없이 쌓여 있는 책상 위 페이퍼와 전공서적. 한 장. 또 한 장. 책상을 정리하면서 현성은 원룸 한 켠 허리 밑 쯤 되는 작은 냉장고 속 맥주를 떠올렸다. 꺼내 마신 맥주는 별 다를 것 없는 맛이었다. 한 모금씩 천천히 들이키며..

소설/경향 2019.04.13